공화당 트럼프 후보의 대통령 당선 소식은 가히 많은 이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 가운데 불똥이 튀긴 곳 중 하나가 페이스북이었다. 페이스북이 트럼프에게 우호적인 가짜 뉴스의 확산을 막는데 실패한 탓에 선거 결과가 바뀌었다는 주장과 함께, 페이스북의 역할과 책임론이 불거진 것이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논란을 잠재우려 했다. 하지만 최근 오바마 대통령 마저 페이스북에 산재한 거짓 정보들과 그 위험성에 대해 언급함에 따라 저커버그는 지난 금요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잘못된 정보에 대한 페이스북의 대응(what we’re doing about misinformation)’에 관한 글을 남겼다.
그는 “우리는 잘못된 정보와 그 책임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지니고 많은 성과를 이뤘으나 (중략) 이는 기술적으로, 철학적으로 모두 복잡한 문제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목소리를 내는데 가치를 두기에, 의견 공유를 막거나 실수로 올바른 내용을 제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며 이를 위해 오류 탐지 기술 강화, 사용자 신고 편의 도모, 서드파티 검증체계 도입 등의 프로젝트를 이미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스스로 진실의 검열자가 되고싶지 않다며 커뮤니티와 신뢰할 수 있는 서드파티에 그 역할을 의탁하겠다는 뜻도 비추었다.
[insight]초기 소셜 네트워크는 전통적 미디어 수용자 입장에서 보면 로빈후드와 같은 존재였다. 루퍼트 머독으로 대표되는 20세기 글로벌미디어의 힘을 인터넷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에게 분배하고, 평평한 세상과 풀뿌리 소통을 가능케 해주는 새로운 희망의 플랫폼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힘은 다시 다른 방법으로 로빈후드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뉴스피드라는 알고리즘을 통해서 말이다.
페이스북은 여전히 스스로가 미디어임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컨텐츠를 유통하고 광고로 돈을 버는 것. 과거의 미디어가 그랬고, 뉴스 생산 및 디스플레이 방식을 떠나서 페이스북 역시 같은 비즈니스 모델을 하고 있다. 컨텐츠 유통 측면에서도 직접적인 큐레이팅을 하지는 않지만, 알고리즘 설계라는 활동을 통해 결국 편집권을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파급력은 더 크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가짜뉴스가 SNS에 어떻게 퍼지는가’에 대한 사례를 발표했다. 팔로워가 50명도 채 안 되는 한 남자의 오해로 시작된 트윗이 트럼프 당선인과 그 지지자들로 하여금 트럼프 반대 시위가 미디어의 사주를 받은 조직적 움직임이라고 믿게하기까지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6만 회 정도 공유되었지만 많은 우파 미디어들이 이를 보도함에 따라 총 노출회수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진원지는 트위터인데 정작 페이스북에서 스무배가 더 넘게 공유됨).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미디어 회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1) 미디어 회사로서 요구되는 책임 및 2) 미디어 산업 분류에 따른 주식 가치 저하라는 두 가지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계산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태생적 힘과 인기의 원천을 생각해보면 저커버그의 말처럼 생각보다 ‘기술적으로, 철학적으로 모두 복잡한 문제’가 맞다. 제품 디자인을 위한 의사결정도 결국에는 일종의 가치판단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자유로운 의견 공유’와 ‘정제된 컨텐츠 제공’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플랫폼적인 고민이 자칫 본의 아닌 검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사용자 측면에서도 페이스북이 단순히 미디어 회사라 인정해버리면 지금과 같은 다분히 개인적 컨텐츠 생산 및 공유 활동이 점차적으로 둔화될 수 있다. 전통적 미디어에 대비, 진정성과 자연스러움을 차별화 포인트로 두는 소셜 네트워크로서는 존망이 걸린 문제일 수 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들도 환희의 태동과 유아기를 지나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다분히 친숙한 유년기적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새로운 기술과 소통 행태를 다루는 선구자적 위치는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하지만 여전히 힘에 따르는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테크냐 미디어냐의 이분법적 잣대를 벗어나 스스로의 다양한 현재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제 3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치 학생, 자녀, 친구, 소비자 등 개인의 다양한 역할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정체성 확립의 시작이 듯 말이다.[/insight]